브라질 이야기

30일, 그 후 일 년 - 기억하기 위해 쓰는 글

착한브라질 2022. 7. 20. 03:13
아무래도 희정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야겠다


1. 

어머니가 동생을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전화 주셨다. 일주일 전 예방접종 맞고 와서 그날부터 열난다며 누워있던 동생. 주말에는 아이들도 데리고 가서 놀다 왔는데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큰일 아니라 생각되어 후딱 일어나라고 짜증도 부렸다. 나오기 전 동생 방에 들어가 우리 이제 집에 간다고 인사했다. 지금 와서 보니 이게 우리 모두 가족이 작별 인사를 한 셈이다.


숨쉬기 어렵다는 동생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응급실은 조용했지만, 코비드가 의심된다며 바로 격리했다. 여러 검사 후 연락하겠다며 일단 집으로 가라고 했다. 이때만 해도 코비드라고 상상도 못 하고 그냥 나아지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다. 일찍 병원에 데리고 갔어야 했는데 못 했다. 왜 무심하게 했는지 지금도 수천 번 되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생 집으로 가서 부모님 모시고 약국으로 갔다. 이것도 사전 예약해야 하는 등 복잡한데 한두 시간 걸려 신속항원검사를 했다. 반응은 양성. 이때부터 우리 집, 아니 세상은 뒤집혔다. 일단 부모님을 동생 집에 다시 모셔다드리고 우리 집으로 돌아와 신속항원 검사했는데 나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은 모두 음성. 3일 후 또 검사했는데 모두 음성이었다.


부모님 집에 먹을 것을 사다 문 앞에 갖다 놓았다. 이미 예방접종을 해서 그런지 두 분은 몸살만 겪으셨다. 따로 약은 없어 해열제만 들고 계셨고 입원한 딸 걱정만 하시는 것이었다. 3일째 되는 날 부모님 지인이 어떻게 알고 연락하셔서 빨리 약을 갖다 드리라고 불렀다. 당시 논란이 많았던 코비드 키트로 각종 비타민과 이버맥틱, 클로로퀸 그리고 항생제가 들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우리 아이들과 간이 검사했는데 모두 음성이었다. 이때 엄청 식겁했다.


세상일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당장 내게 큰일이 닥치니 어쩔 줄 몰랐다. 이런 약을 어디서 어떻게 구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지인이 주위에 알아봐서 이 약들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당장 부모님에게 갖다 드리니 드시고 바로 다음 날부터 상태가 좋아지셨다. 이때 깨달은 것 하나, 배고프고 아플 때는 꼭 주위에 알려야 도움을 받는다.  

 

이때부터 주위에 한둘 알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체 공개하기보다 몇 사람에게만 알렸다. 주위에 기도를 부탁했다. 성당 신자들이 돌아가며 기도해줬고 페이스북으로 연결된 사람도 소식을 알고 연락해 왔다. 매일 같이 기도하며 주님에게 매달렸다.

 

 

오빠, 이제 에크모(ECMO)단데



2. 

동생이 입원하고 소통할 방법이 없었다. 첫날은 연락 없었고 둘째 날에는 숨쉬기 힘들어 산소마스크 쓰고 있다며 괜찮다고 말하는데 눈물이 났다. 그러나 3일째, 아이들과 집에 있는데 갑자기 동생으로부터 화상통화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오빠, 이제 에크모(ECMO)단데” 그러면서 울상이었다. 에크모를 달면 강제 수면 상태로 들어간다.


잠이 들면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아 무섭다며 울기 시작한 동생. 아이들은 고모를 보며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방에 있던 아내도 뛰어나와 괜찮다며 다독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 "다 괜찮을 것이다. 주님이 너를 지켜 주실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이렇게 말은 했지만, 가슴은 뛰며 눈물이 안 날 수 없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가슴이 미어터진다. 

 

화살기도로 주님에게 기도하고 울먹이는 동생을 다독이고. 온이들은 고모의 모습 보고 놀라 '고모~' 하며 부른다. 곧 호흡기 낀다며 전화를 끊으려고 해서 다급히 "은행 비밀번호 알려줘" 말했는데 전화가 끊어졌다. 다시 전화했지만, 역시 통화는 안 됐다. 동생 집에 밀린 공과금과 각종 해결할 일을 걱정하는 아내를 두고 "괜찮아 깨어나면 그때 해결하면 돼" 이렇게 말했지만, 이때부터 25일간 기다림이 연속됐다.


부모님은 매일 같이 동생 소식을 기다리셨다. 병원에서 연락은 오후 3시쯤 한 번 왔다. 환자 상태와 어떤 치료를 하고 있는지 설명하는데 굉장히 복잡했다. 숨쉬기를 유도하기 위해 환자를 뒤집었다 바로 눕기를 몇 번 했다. 그럴 때마다 환자 보호자 동의를 구두로 요청했다. 다행히 개인보험이 있었기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어떻게 했을지 아찔하다.

 

우리 집에 머무르시던 부모님. 쌍둥이 때문에 웃기는 하지만 계속 기도와 눈물로 시간 보냈다.

의사 말에 따라 상황이 급격히 변했다. 때로는 호전한다고 말하고 때로는 안 좋다고 말하는데 듣는 사람 마음은 천국에서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한 의사는 상황이 안 좋다며 마음을 준비하라 그러는데 소름이 끼쳤다. 그러다 다음 담당 의사는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며 다독이기도 했다. 약을 써도 효과가 없다거나, 하루 만에 호전됐다는 소리를 20일째 듣다 보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집에서는 매일 같이 기도했다. 딸도 울먹이며 고모를 위해 기도하는데 감동이었다. 집에서 기다리고 계실 부모님이 걱정되어 고민했는데 아내와 상의하여 일단 우리 집으로 오셨다. 집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자 아이들은 좋아했다. 그러나 무거워진 집 분위기에 아이들도 약간 풀이 죽어 있었다.

 

 

 

음. 현재 상황을 아셔야 할 것 같아 전화 드립니다.
아침에 심장마비가 왔었습니다.


3.

입원한 지 25일째 되는 주일. 아침에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오후에 아이들과 초콜릿 공장에 놀러 가기로 약속했었다. 정확히 아침 11시 30분에 전화가 울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 시간에 연락할 사람 없었고 하루 전날 담당 의사는 이제 거의 다 완치됐다며 월요일 아침에 에크모를 떼고 화요일부터 환자를 방문해도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지 몰라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전화를 받았다.

 

“환자 루치나(동생이름)씨의 보호자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음. 현재 상황을 아셔야 할 것 같아 전화 드립니다. 아침에 심장마비가 왔었습니다. 간신히 지금은 안정된 상황입니다. 자세한 것은 담당 의사가 연락할 것입니다.”

 

전화를 어떻게 끊었는지 생각도 안 난다. 그대로 얼어서 걷는 둥 마는 둥 정신없었다. 아이들은 막 뛰어놀며 아빠와 놀러 갈 생각에 들떠 있었다. 내 얼굴을 본 아내가 걱정되어 물어본다.

 

“무슨 전화야? 괜찮아”

“희정이 심장마비. 지금은 괜찮은데 나중에 연락한다고 하네”

“….”

 

이때의 기분은 잊을 수 없다. 또한 전화를 받은 강단 앞 꽃밭은 지금도 지나가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래도 약속한 것이 있어 아이들과 초콜릿 공장에 갔다. 어떻게 갔는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 상황이 어떤지 궁금하고 빨리 월요일이 되기를 기다렸다. 무엇보다 걱정하실 부모님에게 전화하지는 못했다. 

 

전화받고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아이들과 방문한 초콜릿 공장. 이때 이미 내 마음은 한쪽이 시리며 최악을 예상하고 있었다.

 

연락한다는 의사로부터 소식 없자 월요일 아침에 바로 병원으로 달렸다. 3시간 병원에서 기다린 후 담당 의사와 통화할 수 있었다. 


“루치나 오빠시죠. 지금 상태가 매우 안 좋아요. 몇 분간 심정지로 뇌에 산소 공급이 멈췄습니다. 지금 CT로 촬영하여 결과가 나오면 뇌사 판정을 받게 됩니다.”


이때만 해도 무슨 말인지 몰랐다.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의사 말을 해석해서 들어야 했는데 나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에게 연락하니, 자기는 사무실을 나와 막무가내로 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병실에 들어 가게 해달라고 사정하여 동생을 봤다며 오열한다. 눈을 감고 그저 잠자는 모습에 살아만 있어 달라고 말했다며 우는데 내 가슴도 또 찢어졌다.


다음날 의사가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한다. 주섬주섬 아이들 유치원 보내고 병원에 가서 담당 의사를 처음 만났다. 현재 상황이 어렵다며 뇌사 판정을 받으려면 절차가 오래 걸린다고 담담히 설명해준다.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이를 부모님에게 설명하기 어렵다. 하여간 입원한 후 처음으로 동생을 봤다. 그냥 잠만 자는 것 같은데 이게 뇌사라니.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가 동생 방 앞에서 소리를 치신다. "그래, 이제 다 끝이구나. 내가 알고 있었다. 희정아, 그렇게 가면 어떡하니? 네 침대로 와서 자야지 왜 거기에 있느냐?" 우리 모두 오열했다. 부모님이 그렇게 우시는데 나도 무너졌다. 그러나 슬픔을 그대로 안기에 현실은 냉정했다. 당장 아이들을 데리려 유치원으로 가야 했다. 


부모님을 동생 집에 두고 집에 와서 변호사에게 연락하여 계좌를 열람할 수 있는 절차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변호사는 이미 늦었다며 이제는 상속 절차를 시작하자고 나를 설득했다. 

 

 

 

 내가 희정이 비번 알아냈어. 나 시누이 자격 있지!


4.

뇌사 판정을 받는 절차는 복잡하다. 인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심정지 왔을 때 이미 사망한 것이다. 뇌를 촬영한 CT를 보면 허옇게 보여 있다. 뇌는 이미 끝난 상황에 기계가 연명하고 있다. 물론, 모든 장기는 시간 지나며 하나둘 멈출 것이다. 예전에는 자연사할 때까지 놔두었지만, 이제는 절차를 밟아 확정되면 바로 기계를 끄게 된다.


절차를 이렇게 설명하면 되는데 의사는 희망이 있다는 듯이 설명했다. 하여간 부모님은 집에 두고 이제 어찌해야 하나 조아리고 있었다. 다음날 다시 동생을 보러 오라고 해서 이튿날 가족이 다시 찾았다. 이때는 성당에도 연락하여 신부님이 오셔서 마지막 종부 성사도 주셨다. 그래도 아주 끝나기 전에 종부 성사를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부모님은 내가 모실 테니 걱정하지 말라. 그리고 정말 오빠로서 정말 미안하다." 이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미웠다. 그렇게 수요일이 지나갔다. 아이들 방에서 주무시는 부모님을 위해 정리해야 할 것이 많아졌다. 방에서 부모님이 우시는데 가슴이 찢어진다. 또 하루 가고 뇌사 판정 절차가 남은 마지막 목요일. 오늘도 동생을 보러 오겠냐는 의사 말에 부모님은 이제 끝났다며 가시길 거부하셨다.

 

할 수 없이 나와 아내만 다시 병원으로 갔다. 아직 잠자는 것만 같은 동생. 착한 동생. 내가 해준 게 없는데. 아직 살아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가다니. 원통함에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 이날 오후 최종적으로 외부 의사가 와서 상태를 확인한 후 확정되면 바로 기계를 끈다고 했다. 이게 맞는지 몰라, 주위 사람에게 문의했다. 의사, 변호사에게 물어봤는데 현재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소식에 절망했다. 


장례 준비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할 때. 장례 절차를 도와주는 위령회에서 연락 왔다. 일반 장례사는 비용만 비싸고 어차피 봉사자가 있으니 몇 가지만 준비하라고 알려왔다. 여기저기 연락 오는 것도 정신없고 관부터 사라고 해서 일단 차 열쇠를 들고 문을 나서려고 했다. 그때 거실에 계시던 부모님이 어디 가냐고 물으셔서 멈췄다. 혼이 빠진 얼굴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나가는 아들이 이상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때 잘 아는 형님이 전화 주셨다. 얼마 전 상을 치른 경험이 있어 이건 절대 혼자 할 수 없다면서 필요하면 꼭 연락하라고 하셨다. 다시 차분히 앉아 저녁을 먹고 있는데 병원으로부터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왔다. 부모님도 이제 알았다는 듯이 혼자 가서 잘할 수 있냐고 물으시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은 했지만,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30일간 모든 일이 끝나는 날이었다.


이때 생각난 형님에게 부탁하여 같이 가자고 했더니 흔쾌히 나서 주셨다. 병원에 도착하여 의사를 만나니 저녁 7시에 기계를 꺼서 9시에 사망했다고 알려줬다. 사망신고 하기 위해 반드시 신분증 원본이 필요한데 어디 있는지 누가 알까? 동생 집에 들러 그 늦은 밤 혼자 서류를 찾았던 막막함. 어찌하여 서류를 찾았을 때 그 절망감. 하여간 신고하기 위해 이때부터 묘지, 장례원 등으로 뛰기 시작했다. 


내가 걱정된 아내는 계속 연락해주더니 12시경 울면서 메시지를 남겼다. 동생이 남기고 간 스마트폰 비번을 드디어 푼 것이다. "내가 희정이 비번 알아냈어. 나 시누이 자격 있지" 이러면서 우는데 나도 참 기가 막혔다. 하여간 동생 페이스북 계정에 사망 소식을 올렸다. 새벽에 드디어 대충 결정하고 정리하고 집에 도착했다. 


잠이 안 올 것 같았는데 어느새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꿈에 동생이 나타나 "오빠. 뭐해! 일어나" 하며 부른다. 멀리 떠나갈 것처럼 준비하고 해맑은 표정으로 말한다. 말은 안 했지만, 부모님을 부탁한다는 표정을 짓고 돌아서 나간다. 깜짝 놀라 깼더니 벌써 아침이었다. 병원에서 운구차와 만나기로 해서 준비하는데 잠자고 있던 아들이 일어나 나와서 "고모 간대" 그러면서 운다.

평생 잊지 못할 바로 그날

 

아침 일찍 우버를 불렀다. 차에 타고 계속 울자 무슨 일인지 묻는다. 내 이야기를 하자 힘내라고 마침 자기가 병원 근처에 사니 걱정하지 말라며 출근 시간 교통체증을 뚫고 제시간에 도착했다. 영안실 차가운 곳에 누워있는 동생을 보자 또 눈물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원통하고 평소 사랑한다는 말도 못 해주고 손도 못 잡아줘 불쌍했다. 이렇게 사망한 지 12시간 안에 묘지에 도착했다.

 

 

 

이제 이 집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 인사해


5. 

묘지에 도착하여 장례를 잘 치렀다. 얼마 전만해도 판데믹으로 장례식이 금지였는데 다행히 풀려 많은 사람이 찾았다. 새벽에 올려진 페이스북 소식을 보고 동생 친구들이 많이 왔다. 헐레벌떡 뛰어와 울며 위로하던 친구와 동료들. 이를 보고 동생이 얼마나 진실한 삶을 살았는지 알게 됐고 조금이나마 위안됐다. 장례는 잘 끝났다. 부모님이 관에 흙을 뿌리는 것을 막았다. 자식을 손으로 직접 묻는 것은 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유치원 끝나고 원장님 집에서 자기로 미리 약속했었다. 다행히 일찍 끝나 아이들을 데리러 가는데 잔뜩 겁에 먹은 녀석들이 "옷이 없어서 집에 가야 해요" 하며 나온다. 장례를 치른 날에도 밥은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부모님과 우리 모두 살아야 하기에 밥을 챙겨 먹었다. 그 다음 날부터 우리는 준비할 것이 산더미 같아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장례식 다음날 당장 부모님이 입으실 옷과 이불을 가지러 동생 집으로 향했다. 분위기를 아는지 아들은 소파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오지 않는다. "이제 이 집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 인사해" 하며 동생 방으로 데리고 갔다. 아이들과 고모의 추억이 가득한 그 방과 이렇게 작별했다. 동생이 살던 집을 정리하면서 고생했다. 3주 만에 이사한다고 통보했다. 원래는 색칠도 다시 해야 하고 위약금도 내야 하지만, 사정사정하여 그냥 반납하기로 했다. 


가구 정리도 쉽지 않았다. 중고로 팔까 알아봤지만, 시장에 하도 물건이 많아 거래가 안 됐다. 깨끗한 가구와 고급 침대 등 모두 버렸다. 평소 모으기 좋아하는 동생의 수십 년 된 머그잔과 열쇠고리 등 동생의 흔적을 다 버렸다. 사진과 책은 일단 창고를 빌려 쌓아 뒀다. 일 년이 지났지만, 아직 창고에 있다. 부모님은 하루 아침에 딸을 잃으시고 슬픔에 잠길 새도 없이 살던 터전을 정리해야 했다. 어머니의 손길이 가득한 살림을 정리하는데 끝이 없었다.

장례식 다음날 고모집에 도착하여 슬픈 우리 아들. 아버지 스스로 모든 것을 분해하고 조립하고 버리는 모습. 가만 있으면 죽을 것 같아 수십 번 차에 가득 실고 왕복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양쪽 집을 오가며 조금씩 이사했다. 먼저 우리 집을 정리해야 동생 집에서 짐을 가져올 수 있었다. 기증하는 곳에 연락하여 가구와 짐을 하나씩 보내고, 빈 자리에 채울 가구와 짐을 분해하여 차에 실어 왔다. 3주간 족히 50번은 왕복한 것 같다. 이렇게 석 달간 쉬지 않고 일하다 보니 울 시간도 없었다. 깊은 슬픔 골짜기에서 우리 모두 말없이 묵묵히 일만 했다. 몸이 아플 새도 없이 계속 움직였다.


집이 엉망이라 어디 누울 곳도 없었다. 폭탄 맞은 것처럼, 거실과 복도를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차츰 하나씩 버리자 비로서 자리 잡아갔다. 좁은 집이었지만 부모님과 살려고 했다. 살다 보면 다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후 부모님 생각이 달라지셨다. 아무래도 브라질이라는 나라에 정이 떨어지셨고, 계속 동생 생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으셨다. 의사와 상담해보니 두 분은 중증 우울증을 앓고 계셨다. 안 되겠다 싶어 잠시 다녀온다는 명목으로 모두 두고 한국으로 나가셨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시지 않을 것이다.

 

 

이 긴 고통의 시간을 함께해 주신 여러분, 기도해 주신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6.

이렇게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참 모르겠다. 처음 사 개월은 믿기지 않는 현실. 꿈같은 현실이라 그냥 무덤덤했다. 부모님이 떠나신 후 우리 가족만 덩그러니 남은 어느 날. 신체검사를 위해 병원에 가야 하는데 아이를 돌봐 줄 사람 없어 난처했다. 이제는 우리 가족이 스스로 헤쳐 나가야 했다. 육아와 살림에 빠져 살았다. 사회 활동을 줄여 철저히 아무것도 안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활동을 줄였더니 비난도 들었다. 근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동안 생각하기 싫어 동생 일을 철저히 무시했다. 꼭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끔 마지막 일주일간 병원에 오간 일이 기억나면 고통스러웠다. 혼자 밤이고 낮이고 운전하며 병원을 오고 간 일, 영안실에서 동생 시신을 찾을 일부터 장례식은 기억하기도 싫었다. 가장 마음에 아픈 건 경제적으로나 필요할 때 오빠가 해준 것은 없고 받은 기억만 남아 나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일 년간 무시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받아들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잊기보다 기억하기 위해 하나씩 끄집어내 기록하는 것이다.


동생은 정말 아까운 인재였다. 지적이고 판단력도 빨랐다. 사회생활도 빨리 시작하여 경력도 대단했다. 여행도 많이 다니고 꿈이 많았다. 학벌도 좋아 미래가 창창했다. 그러나 일찍 혼자 살며 세상 풍파 속에서 상처를 많이 받아 때로는 괴팍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래도 미움을 받는 짓은 하지 않았다. 결혼하지 못해서 그런지 우리 아이들을 자식처럼 키웠다. 있는 것 모두 사주고 우리 부부보다 앞서서 이것저것 알아봐서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이런 사랑이 그리운지 우리 아들이 요즘 부쩍 고모를 찾는다. 어휴


평소 잔병치레가 많아 고생 잔뜩 했다. 항상 약을 달고 살았고 새로운 병명이 발견될 때마다 훈장을 달듯 했다. 코비드가 창궐하고 이 부분을 가장 염려하여 집 밖에 나오기를 꺼렸다. 아프기 시작한 날도 일 년 반 만에 예방접종을 하러 나간 날이기도 했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다들 노심초사한 게 원래부터 있던 지병과 이미 경험한 적 있는 폐 혈전색전증을 우려했는데 바로 이놈 때문에 심장이 멈추며 뇌사가 온 것이다. 결국, 지병이 원인 되어 사망했다. 코비드가 아니라 원래 아파서 하늘나라에 간 것이라고 우리 가족은 서로 다독인다. 


동생이 떠나고 아직 해결 못한 것이 많다. 계좌도 못 열고 상속도 해결되지 않았다. 쓰고 있던 스마트폰 번호도 해지하지 못했다. 추심 회사에서는 카드비가 연체됐다며 연락해 오는데 변호사는 이제 더는 낼 필요 없다고는 하지만 마음은 무겁다. 일단 법원의 판단이 나와야 하는데 아직 답이 없다. 구글 계정도 그대로 두고 누가 보면 그냥 멈춘 것 같은데 보고 있는 가족으로서는 크나큰 고통이다. 빨리 모든 것이 해결되어 묻어 버리고 싶다. 

 

일 년 동안 많은 것을 깨달았다. 다시는 예전 같은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을 충실히 산다. 누구는 슬픔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나는 이 슬픔을 발판 삼아 더욱 열심히 살고 있다. 이런 깨달음을 주고 떠난 동생이 미우면서 또 고맙다. 항상 나를 사랑해주고 많이 주고 떠난 동생. 너무나 보고 싶고 서운하지만, 다시 볼 그날이 있음을 알기에 글을 끝마친다. 이 긴 고통의 시간을 함께해 주신 여러분, 기도해 주신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이 주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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