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이야기

미국이 아닌 브라질이라면? 유대인 그리고 네덜란드의 영향

착한브라질 2013. 9. 28.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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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브라질 소식을 전하는 착한남편운동본부입니다.

착한남편운동본부 이름이 너무 생소하다고 하시는 남자 분들이많은데..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닉네임이니 부담 갖지는 마시고 그냥 글만 보세요...

아내가 있는지 먼저 물어보아야 하는게 예의 아닌가~~라고 하시면 낭패..!


아 그리고 저한테 학교 과제...이민준비...회사 업무 등으로 브라질에 관한 질문들을 많이 하시는데..

최대한 답을 해드리려고 하는데 쉽지는 않네요..

그래서 아래 두 개의 카페를 알려 드립니다. 


브라질 이민과 사업진출에 관한 질문은 다음카페 브라질 이민에 대하여 바로가기 ▶ http://cafe.daum.net/vivobrasil

포르투갈어 배우기 및 브라질 소식은 네이버카페 해피스터티 포르투갈어▶  http://cafe.naver.com/happyportugues

 

물론 두 카페에 제 글을 게재하고 있기는 합니다.


아 그리고 매번 쓰지만 또다시 알리는 중요한 점 !

 

제 블로그를 찾아서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미리 알려 드립니다.

제 글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과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쓰인 글입니다.

물론 역사를 뒤틀려 해석하지는 않았지만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고,

견해의 차이로 크게 다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냥 재미로만 한 번씩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니 인간들이 너무 어지러워 한 번 싹 정리하신다고 하여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합니다. 착한 노아는 큰 배를 만들어 온 갖 들짐승.집짐승을 넣고 40일간 폭우를 피하고 살아납니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 목숨을 구한 것은 좋은데 그 많은 동물이 쏴대는 배설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엄청나게 쌓여서 산을 이루다가 드디어 냄새를 참지 못한 노아가 결정을 내립니다. "문을 열어 바다로 던져라~" 이렇게 산을 이룬 그 많은 똥은 두둥실 바다로 흘러갔고 배 안에 남아 있던 사람과 동물은 모두 시원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흘러 무지 흘러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고 살았는데 한 포르투갈 탐험가가 "도대체 그 많은 똥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전혀 도움 안 되는 호기심에 그 똥산을 찾아 나섰다고 합니다. 인도 항로 개척 접어 버리고 수년간에 걸쳐 고생한 끝에 드디어~~~!!!! 그 똥산을 발견했는데....그날이 바로 1500년 4월 21일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1500년 4월 21일은 포르투갈 탐험가 Pedro Alvares Cabral 이 브라질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날이라고 합니다. 뭐 웃자고 한 소리입니다만 믿거나 말거나. 하여간 브라질은 1500년 4월 21일에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 살던 인디오들에게는 발견은 무슨 개뿔 너희가이민을 온 것이겠지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발견도 Pedro Alvares Cabral 이 아니라 다른 탐험가가 먼저 했었다고 하는 등 요즘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처음 발견된 브라질 땅은 포르투갈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이지 못했습니다. 그저 금이나 캐어 가려고 했는데 금은은커녕 아무런 보석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일부 인디오들을 만났지만 역시 이들은 금보다는 그저 백인들의 흰 피부와 옷차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술이라는 것도 처음 접한 인디오들이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기도 했지만 역시 포르투갈인들에게는 매력적이지 못했지요. 그래서 거의 버려지다시피 하던 중 Pau Brasil 이라는 나무가 발견됩니다. 이 나무는 arabutã, ibirapiranga, ibirapitanga, ibirapitá, orabutã, pau-de-pernambuco, pau-de-tinta, pau-pernambucoe 뭐 이런 복잡한 이름으로도 불리데 끓이면 빨간 염료를 만들 수 있는데 16세기만 해도 이 색은 왕이나 종교인들만 사용할 수 있는 색이어서 엄청 비쌌다고 합니다. 1530년까지 이 나무를 잘라가 포르투갈에서 염료 장사로 돈 좀 버는데 이때 이 나무 이름으로 인해 브라질 국명이 탄생하였다고 합니다. 브라질 나무가 나는 땅, 브라질. 


그러나 역시 역사는 다시 새롭게 발견되는 사실들을 통해서 재조명되는데 Brasil 이라는 이름은 원래 아일랜드 근처에 있다고 추정되는 상상의 섬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완전 환상의 섬, 무엇이든지 있는 섬이라고 하는데 브라질이 하도 멀고 신기한 동.식물들이 많아서 당시 많은 사람이 그 섬이 아닌가 해서 부르며 유래됐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설명은 당시 가장 큰 염료 시장이었던 베네치아에서는 예멘에서 수입하는 wars 라는 나무를 사용해서 염색하는데 이게 변형되어 verzino, verzi, verçí,으로 발전되다 brésil 그리고 최종에는 "Brasil"로 바뀐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물론 포르투갈어 Brasa 와 Abrasado 와 같이 짙은 나무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됐다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브라질은 처음에는 나무만 발견되나 차츰 성을 쌓고 사탕수수 재배에 성공하며 점차 마을에서 도시행태를 띄웁니다. 당시만 해도 성은 바다와 땅을 보전한다는 의미보다는 인디오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세워집니다. 이는 모든 물자와 거래는 바다로 하고 땅은 인디오들의 습격으로 좀 위험하다는 생각들이 많았죠. 


1578년 당시 포르투갈 왕이었던 24살 동 세바스찌엉 1세(D. Sebastião I de Portugal)가 모로코 원정에 나섰다가 전투에서 대부분 군인들이 몰살당하고 행방불명됩니다. 왕이 없어지면서 갑자기 왕위계승 문제가 생기는데 같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스페인의 펠리피 1세가 포르투갈 왕권을 이어받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 반대파도 많았고 여러 분리 운동도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1580년부터 완전독립을 취하는 1640년까지 포르투갈은 전 식민지와 힘을 잃어버립니다. 아래 지도는 당시 빨간색 스페인 식민지와 파란색 포르투갈 식민지를 나타냅니다. 아주 거대한 나라가 탄생한 것입니다.



포르투갈을 집어삼킨 스페인은 또 다른 조치를 취하는데 당시 식민지였던 네덜란드와 브라질과의 거래를 못 하게 금지했습니다. 네덜란드로써는 사탕수수 재배에 돈을 많이 들였는데 큰 피해를 당합니다. 이를 좀 더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네덜란드는 16세기 초부터 불기 시작한 종교개혁에서 캘빈주의를 받아들였고 종교의 자유를 주어 전 유럽에서 유대인과 상인들이 몰리며 갑자기 대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자금을 많이 축적한 네덜란드는 신규 시장 개척과 개발이라는 목적 아래 인도와의 거래를 위해 또 해양사업에 뛰어들게 됩니다. 포르투갈로부터 시작한 해양개척은 스페인을 거쳐 이제 네델란드까지 뛰어 들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동남에서 재배되는 사탕수수를 남미에서도 재배에 성공하면 설탕을 직접 재배.가공.판매하게 됩니다. 


원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투자와 시장이라는 두 개의 합의점으로 거래 하던 나라였습니다. 포르투갈로써는 별로 큰 도움이 안 되는 브라질 땅에 네덜란드 인들이 사탕수수 재배를 하도록 둔 것입니다. 물론 세금을 받으며 거래를 한 것이죠. 네덜란드로써는 자금과 기술력으로 거대 농장을 만들고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와 일을 시키며 사업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되자 시장은 물론 투자해 놓았던 것도 다 잃게 됩니다. 스페인의 섭정을 받다 1568년부터 1648년까지 시작된 80년 동안 독립전쟁을 할 정도로 악화한 두 나라의 관계로 브라질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던 네덜란드는 몇 차례에 걸쳐 브라질 침략을 시도합니다. 주요 해안 도시에서 성만 쌓고 살던 브라질 침략은 어렵지 않았죠. 당시 문헌을 보면 네덜란드 인들이 배를 타고 와서 도시를 점령하면 도시 사람들은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와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스페인 함대를 이끌고 지원대가 오면 네덜란드 인들은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1630년 카리브에서 스페인 본국으로 보내지던 은덩이를 카리브 해에 있던 네덜란드가 탈취합니다. 이를 자금으로 삼아 총 64척의 배에 3,800명의 인원을 꾸려 브라질 북동부에 위치한 올린다(Oinda)와 바로 인접한 헤시피(Recife)시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곧 바로 본국에서 6,000명의 추가 군인들을 받아 충원하여 이번에는 완벽히 브라질을 점령하려고 합니다. 이들을 피해 산으로 피한 시민들은 이들이 곧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차츰 돌아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계 브라질인들과 금방 친해집니다. 원래부터 거래를 목적으로 점령한 것이어서 오히려 브라질 사탕수수 농장 주인들에게 자금을 대줍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대량 들여와 이들을 싼값에 농장에 공급하며 생산량을 늘리도록 합니다. 그러나 설탕 생산의 가장 핵심 기술인 정제는 반드시 네덜란드인이 합니다. 하여간 설탕 수출로 돈을 많이 법니다.


신세계 거주지를 드디어 마련한 네덜란드인들은 인구를 늘이기 위해 현지인들과 결혼을 많이 합니다. 군인들로 구성된 인원이어서 그런지 인디오와 흑인 그리고 포르투갈계 현지인들과 결혼을 하며 아이들이 많이 자랍니다. 그리고 브라질을 점령하는 동안 살았던 8만 명의 네덜란드인으로부터 현재 1백만명의 후손이 사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본국에서 오는 이들 중에는 유럽에 살며 갖은 핍박을 받고 특히 불기 시작한 종교재판을 피해서 네덜란드로 피신했던 일말의 포르투갈계 유대인들도 있습니다. 돈은 많지만, 어디를 가나 차별을 받던 유대인들도 브라질로 옵니다. 



1636년 암스테르담에서 온 Isaac Aboab da Fonsec 랍비에 의해 남미에 첫 시나고가 즉 유대인 희랍당을 설립하며 자리를 잡아 갑니다. 600 세대에 이를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몰려 사며 브라질, 네덜란드 인들과 화목하게 살아갑니다. 돈도 많았던 이들은 모든 경제에 깊게 개입하여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고 투자에 선금을 내는 등 깊은 관여를 합니다. 종교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자유를 추구하던 네덜란드 점령지는 만연히 발전할 것만 같았는데 내부적으로는 전투가 끊이 없이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포르루갈 직계였던 사람들은 항상 불만을 품고 때로는 인디오들을 동원해서 반란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위협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다 드디어 1640년 포르투갈의 4번째 왕족혈통인 브라간사(Braganca) 공작이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동 주엉 4세로 임관하며 스페인으부터 독립을 선언합니다.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사이 경쟁에서 밀려났고 끝이 없는 해적들의 피해로 파산직전이었던 포르투갈 상인들의 불만, 그리고 오랜 전쟁으로 군인이 모자랐던 스페인은 포르투갈 귀족들을 전투에 보냈으나 정작 목숨만 잃게 하고 얻는 게 없었던 귀족들의 불만이 모여 1640년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와의 전쟁 중 패하여 힘이 많이 약해져 있던 스페인은 반대하며 1668년까지 근 28년간 전쟁을 벌였지만, 국운이 이미 꺾여 평화협정(리스본 협정)을 맺게 됩니다. 독립운동 시기에 포르투갈은 프랑스, 신흥세력 영국, 네덜란드, 로마와 협약을 맺으며 위치를 확고히 하고 안으로는 성을 쌓고 정치.경제 안정에 힘을 쏟아 재부흥에 성공합니다.


나라를 되찾은 포르투갈은 먼저 네덜란드와는 1640년 10년간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전쟁보다는 서로 힘을 합쳐 스페인을 공격하자는 것입니다. 이때 이 협정으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 힘을 쏟아 드디어 1648년에 독립에 성공합니다. 포르투갈은 앙골라와 아프리카 식민지를 다시 찾아와 힘들 키우다 1654년 드디어 브라질 헤시피 시도 되찾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포르투갈이지만 그래도 네덜란드에게는 좋은 장사였습니다. 먼저 40년에 걸쳐 8백만 Florins를 받기로 했는데 당시 금액으로 보면 63톤의 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령에 있는 섬 Molucas와 스리랑크를 양도합니다. 이렇게 돈을 지급한 이유는 네덜란드가 만약 피해금액을 안 주면 끊임없이 해군을 끌고 와 침략하겠다는 협박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도시를 되찾는데 많은 이바지를 한 브라질인들은 이때부터 독립의 꿈을 꾸게 됩니다.



자 역사는 다시 흘러 헤시피시가 포르투갈에게 넘어가자 400여 명의 유대인들은 공포에 빠지게 됩니다. 네덜란드인들이 만약 본국 귀환을 거부하고 남는다면 재산도 그대로 보존하며 다른 외국인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3개월 안에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떠나라고 합니다. 3개월 안에 재산을 처분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종교재판에 넘겨질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시간은 흘러 4월 7일 당시 도시 최고 책임자인 Francisco Barreto de Menezes 은 출국기간을 넘긴 유대인 중 원 유대인과 달리 기독교에서 유대인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종교재판에 넘길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극도의 공포심을 가진 150명의 유대인은 그 다음 날 프랑스로 가는 배에 타 바로 떠납니다. 


이렇게 400여 명의 유대인은 남미를 떠나 네덜란드로 간 사람도 있으나 가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다시 신세계로 돌아와 자메이카, 바바도스, 꾸라싸오 같은 카리브에 자리를 잡아 브라질에서 가져간 사탕수수 농장을 꾸려갑니다. 그리고 일부는 담배 재배에 성공합니다. 브라질을 떠난 유대인들의 삶은 정말 고달팠습니다. 그중 23명이 탄 배가 중간에 스페인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종교재판소로 보내질 뻔했지만 프랑스 배가 나타나 이들을 살려 주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다시 배를 타고 떠나 새로운 땅에 도착해서 막 형성되기 시작한 네덜란드인들이 만든 도시 뉴 암스테르담이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뉴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이들은 도시 형성에 많은 참여를 하며 이곳에서도 첫 시나고가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 도시는 10년 뒤 영국인들에게 넘어가 뉴욕이라고 새로 명명됩니다. 그렇습니다, 브라질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떠나 도착해서 정착한 도시 뉴욕! 1667 영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며 유대인들이 많이 몰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시나고가 근처에 몰려 사며 살던 이들은 미국이 독립을 취한 후부터 안정을 취하며 나라 발전에 참여하며 영향력을 미치게 되며 지금은 세계최대 유대인 사회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생각합니다. 만약 브라질이 유대인을 쫓아내지 않고 그대로 포용했다면? 세상 강국은 지금의 미국이 아니라 브라질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세상은 영어가 아닌 포르투갈어로 대화 하고 있을지 상상도 해 봅니다. 재미있으셨나요? 그럼 다음에 더욱 재미난 글로 다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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