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이야기

브라질 독립은 나폴레옹 때문? 1822년 9월 7일

착한브라질 2013. 9. 11. 10:37
반응형


안녕하세요.

밝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착한남편운동본부장입니다.

오늘은 브라질의 역사 한 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아 그리고 제 블로그를 찾아서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미리 알려 드립니다.

제 글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과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쓰여진 팩트 글입니다.

물론 역사를 뒤틀려 해석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고..

견해의 차이로 많이 다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냥 재미로만 한 번씩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역사는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항상 변하고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에는 환경.시대.발전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한 인물의 영향으로 펼쳐지는 역사도 있기도 합니다.

사실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9월 7일은 브라질 독립기념일입니다.

남미 최대국가 브라질이 포르투갈로부터 분리를 선언하며 나라를 형성했는데.

브라질 독립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프랑스의 불세출 영웅 나폴레옹입니다.

유럽에서 호령하던 나폴레옹이 어떻게 이 멀리 남미 독립에 영향을 끼쳤는데 지금부터 하나씩 헤쳐 나가 보겠습니다.


지금은 남미 최대의 나라인 브라질은 원래 포르투갈 식민지로 개척되었습니다.

당시 유럽 변방국이며 늦게 국가를 형성한 포르투갈은 정신을 좀 차리고 당시 무대중심 지중해로 눈을 돌렸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역을 해야 하는데 옆나라 스페인이 떡하나 길을 막고 있어서 쉽게 나아가지 못했죠.

교역이 없다보니 살기 막막하던 포르투갈은 중대결정을 내립니다.

바로 인도로 가는 길을 새롭게 개척하는 것....!

당시만 해도 지구는 평평해서 바다 끝에는 낭떠러지라고 생각하던게 흔했는데..

물론 이 부분은 요즘 역사가들은 당시만 해도 벌써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아직 긍정하지 않던 시절이였죠.



하여간 15세기 초 세계적인 발견 그리고 탐험의 시대를 포르투갈이 처음으로 문을 엽니다.

그 이유는 어차피 지중해로 나가 무역을 할 수 없다면 반대쪽으로 나가 인도항로를 개발하려는 의지가 작용한 것이죠.

처음에는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내려가다 드디어 희망봉을 돌고 세계최초로 인도항로를 개척했습니다.

아 이러한 이야기는 이미 제 블로그에 올렸으니 한 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 -> http://blog.daum.net/joaobrazil/32


포르투갈에서 본 브라질은 처음에는 거의 쓸모 없는 땅이였습니다.

이 땅에서 금은보화가 발견되지 않고 단지 빠우 브라질(PAU BRASIL) 이라는 나무가 많이 났는데.

이 나무를 끓여서 빨간 염료로 사용할 뿐 매력적이는 않았던 땅입니다.

참고로 이 빠우 브라질 나무에서 현 브라질 나라 이름이 유래한 것입니다.

18세기 드디어 동남부의 현 미나스제라이스 주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재배에 성공한 사탕수수로 설탕 장사를 하는 등 조금씩 관심을 받게 되죠...

역사는 흘러 흘러 가던 중...


1799년에 동 주엉 6세(João Maria José Francisco Xavier de Paula Luís António Domingos Rafael de Bragança)가 집권합니다.

당시 여왕이였던 어머니 마리아 1세가 정신병자로 집권할 수 없고 장자인 형 동 주세가 사망해..

어쩔 수 없이 서열에 따라 왕권을 이어 받습니다.

그러나 동 주엉은 왕이 될 야망은커녕 그릇도 못 된 사람이었습니다.

겁도 많고 의심도 많았던 이 왕은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급진세력 나폴레옹을 두려워 하며 한동안 수도를 브라질로 옮기는 것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이 왕에게 브라질은 매력적이였나 봅니다.

 

유럽을 무슨 동네 땅따먹기 하듯이 쉽게 접수하던 나폴레옹은 거슬리던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내립니다.

대륙봉쇄령...말은 멋있지만 꼭 말 안 듣는 사람이 있듯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반대합니다.

포르투갈 내부에서는 친영국파와 친프랑스파로 나눠져 대륙봉쇄령에 따라야 한다 반대해야 한다... 한참 시끄럽습니다.

그리고 이때 나폴레옹이 군대를 보내 포르투갈의 옆동네이며 버팀목이였던 스페인을 침공을 하게 됩니다.

친영국파들은 국왕을 설득시켜 일단 왕이 있어야 왕국이 있어야 한다며 브라질로 피신할 것을 건의 합니다.

친프랑스파들은 이번 참에 영국과 손을 끊고 프랑스에 붙어야 살수 있다고 꼬드깁니다..

물론 동 주엉은 식민지에서 긁어 모은 금은보화로 나폴레옹 환심을 사서 자신의 왕국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자 이제 영국 발등에 불이 떨어 졌습니다.

만약 포르투갈이 나폴레옹 수중에 떨어지면 포르투갈이 보유한 전세계 식민지에서 올라오는 물자가 다 프랑스로 가고 자신들은 절대적으로 고립됨을 잘 알고 있었죠. 

그래서 이들은 왕을 설득하여 브라질로 피신하기를 적극 권장합니다.


"나폴레옹 걔 믿을게 못되는 친구야..."

"그 친구 취미가 유럽 왕 목아지 따서 모으기래.."

"이런 소리 들어 봤나.....뎅~~~~~~강 이라고"


뭐 이런 갖가지 소리로 겁을 주어 피신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동 주엉 6세는 역시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결정을 못합니다.

그때 수도 리스본 바로 옆 동네까지 프랑스군이 온 것을 깨달은 영국은 드디어 중대 발표를 합니다..


"그냥 배타고 브라질로 갈래 아니면 여기서 포탄 받고 갈래!!!!!!"

 

당시 최강의 해군을 자랑하던 영국 해군의 위협은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다급해진 영국도 어쩔 수 없이 떠나도록 힘을 씁니다.

쉽게 결정하라고 했을 때는 딩가딩가 놀더니 대포 총구가 왕국을 겨누는 것을 본 동 주엉은 쉽게 중대 결정을 내립니다.

 

"야들아~ 우리 브라질로 왕국의 수도를 이전한다...ㅇㅋ!"


결정은 순식간에 온 도시로 퍼지면 혼란이 일어납니다.

한 나라의 수도이전을 준비기간도 없이 삽시간에 결정했기에..

온 나라의 배들은 왕족이 압수!

왕족들과 금은보화를 싣고 떠납니다. 

이 것이 그 유명한 1807년 11월 27일 포르투갈 대피령입니다.

총 14대의 배에 1만 3천 명의 왕족이 영국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출발하려고 했는데.

정작 28일까지 맞바람이 불어 출항을 하지 못하다 29일 아침에야 드디어 출항합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30일 오전 9시에 도착해서 한 발의 차이로 포르투갈을 한 손에 넣지 못한 것이죠...

당시 문헌을 보면 포르투갈은 난리 아닌 난리였다고 합니다.

빵을 만들던 사람도 잡혀가고 빵을 만들 밀도 가져가고..

갑자기 주인이 없어진 포르투갈은 나폴레옹 군대가 쉽게 접하고...

너희 왕이 너희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우기며 섭정을 시작합니다...



자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일한 대륙간 운송수단인 항해는 고역이었고 또한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 나갔다 길을 잃을 수도 있고...

미친듯이 몰아치는 대서양 폭풍우로 침몰....

바다 한 가운데 사는 무시무시한 괴물....음?

하여간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일단 영국군들의 호위와 수십척이 줄줄이 사탕으로 움직여서 길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식수와 음식 조달이였습니다.

식수는 큰 나무통에 담아 여행을 시작하는데 당연히 몇주 지나면 상하기 일수여서 먹기 고역이었죠..

그리고 음식은 살아 있는 소. 염소. 돼지를 잡아 먹기는 했지만 비타민C 부족으로 괴혈병으로 고생을 하죠..

샤워는 어차피 당시 유럽 사람들은 잘 안 씻기에 그렇다 치고...

몇 달의 걸친 여행은 사람들 몸 자체에 변화를 일으키게 합니다.

바로 "이"가 창궐할 것입니다.

이 놈들은 남녀노소 그리고 직위를 가리지 않고 공격을 하게 됩니다.

요동치는 배 안에서 머리를 긁적이던 귀족들 특이 여성들...가려워서 난리납니다... 

참다 참다 못한 왕이 드디어 왕명을 내립니다..


"머리를 다들 빡빡 밀어 버려라~~"


이 왕명으로 배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밀어 버립니다..

모두 잘려진 머리를 보면서 시원섭섭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여자는 여자인지라 머리를 잘려서 울며불며 걱정합니다..

이런 머리로 어떻게 식민지 촌사람들을 만날까 걱정 아닌 걱정을 할 때...

한 노예가 번뜩이는 재치로 여자들에게 터번을 두르기를 권장합니다..

이로써 여자들은 일단 머리를 감추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이 브라질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릴 때 터번을 두른체 내리자..

이를 본 브라질 여자들은..


" 오 저게 지금 유럽에서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인가 보다~!"


하고 머리를 잘라서 터번을 두르게 되었답니다..

뭐 하여간 이때부터 지금까지 살바돌 지역에서는 여자들이 터번을 많이 두르고 있기는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역사는 또 다시 흘러서...

포르투갈을 떠난 배는 먼저 3일간 북향으로 몰려가다 드디어 남향이 불어 기수를 돌립니다.

그리고 당시 식민지였던 일랴 마데이라(Ilha Madeira)에 도착하나 태풍으로 선단이 나눠져 왕자들이 승선한 배는 바로 브라질로 향합니다.

왕이 탄 배는 마데이라 섬에서 좀 쉬다 12월 말에 드디어 브라질로 출항합니다.

그러나 미칠 역방향 바람으로 10시간에 갈 거리를 10일에 거쳐 갈 정도록 고역이였습니다.

54일동안 항해하다 드디어 1808 1월 22일 당시 브라질 수도였던 살바돌에 도착합니다.

브라질 수도였지만 그래도 갑자기 1만3천을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없던 살바돌은 혼란에 빠집니다.

그래도 이곳에 도착한 왕은 최초의 대학을 세우라고 명하고 시찰하고 세금도 직접 거둬가고...

홀라당 다 배에다 싣고 또 다시 떠납니다...좀 더 시원한 남부 도시 리우데자네이루를 향해서~~~

이때부터 1960년 브라질리아로 천도할 때까지 리우데자네이루로는 브라질 수도가 됩니다.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한 왕은 먼저 영국을 포함한 반 프랑스 우호세력에게는 개항한다고 선포합니다.

영국으로는 든든한 우방국이자 앞으로 필요하면 이래라 저래라 관섭할 수 있는 나라 하나 만들어 놓은 격이 됩니다.

이 부분이 중요 합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래에서 보겠습니다..


하여간 동 주엉 6세는 할일 없이 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할듯이..


방꼬두브라질(브라질 은행)을 세웁니다.

왕정실록을 기록하고 식민지로써 금지되었던 신문발행을 허가합니다.

왕립군사학교를 설립하여 군사를 체계적으로 키워 나가고.. 

왕립의학교도 설립하여 드디어 의사들도 배출합니다..

브라질 지방 관리체계를 도지사로 변경하여 직영으로 바꾸고

국립도서관과 식물원도 창립합니다..


물론 하루 아침에 한 것이 아니라 수년에 걸쳐 최소한 1820년에 포르투갈에 돌아가기전 까지 일을 한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식물원입니다.

원래 동 주엉 6세 취미는 식물 연구라고 합니다.

포르투갈에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식물원을 놓고 나온 것을 후회한 왕은 브라질에 다시 세울 것을 명령하고

당시 식민지였던 동남아에서 가지고 온 각종 식물들과 나무들을 심어서 브라질 땅에 맞게 개량을 합니다.

특히 까람볼라(Carambola), 프루따두꼰지(Fruta do Conde),자까(Jaca)등은 원래 동남아 원산지였는데 이곳 브라질에서 크게 재배하게 됩니다.



자 여기까지가 역사의 전반전이면 이제 후반전으로 들어가 봅니다.

드디어 이제 브라질독립에 대해서 다뤄 보겠습니다.

시간은 흘러흘러 어느덧 1820년....

유럽을 전쟁터로 바꾸었던 나폴레옹도 드디어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포르투갈에도 섭정, 잠시나마 공화국 선포 그리고 다시 왕정 등 정치가 어수선합니다.

정작 동 주엉 6세 왕은 브라질에서 잘 있는 동안 포르투갈은 정세가 급격히 변하고 있었습니다.

동 주엉을 비롯한 왕족들은 나폴레옹을 피해 브라질로 왔지만 문제가 발생한게.....

바로 브라질이 너무 좋다는 것...!

날씨가 조금 더운 것 빼고는 추운 겨울도 없고.... 

물자도 풍부하고....!

노예도 풍부하고....!

모든게 좋다보니 돌아갈 생각들을 아예 접어 버렸습니다.


반대로 포르투갈 사정은 더욱 좋지 않습니다.

브라질로 수도를 옮기면서 모든 재정 또한 가져 왔기에 경제는 파탄되었고..

나폴레옹이 물러간 후에 식민지와 거래를 다시 시작했지만 예전 갔지 않습니다.

이런 와중에 일부 군인들이 목소리를 냅니다..


"우리를 버리고 간 왕을 모셔야 하다니...차라라 공화국을!"


혁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들은 프리메이슨이라는 단체와 연계하여..

당시 강국이며 내정에 간섭을 많이 하는 영국세력을 몰아내고 평등주의를 주장합니다.

물론 영국과 일부 귀족들의 반격으로 이들은 체포 및 해산 당하지만..

절실히 왕의 귀환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고..

동 주엉 6세는  아무리 그래도 왕국의 뿌리인 포르투갈을 잃을까봐 허겁지겁 돌아옵니다..  

그 대신 브라질에 장자인 동 뻬드로 1세를 책임자로 세우고 배 타고 돌아 갑니다..



준비되지 않은체 왕이 된 아버지와 달리 동 뻬드로 1세는 어렸을 때부터 수업을 천천히 받아 왕의 기질이 확실한 인물입니다.

다혈질에 공부도 많이 했지만 특히 정치적으로 눈치가 빠르기로 유명합니다.

뻬드로 왕자 또한 원래는 아버지와 함께 포르투갈로 가기로 했으나 그래도 이 넒은 땅을 지켜야 하기에 남습니다.

영웅이여서 그럴까...뻬드로 왕자는 여자들을 그리 좋아합니다.

그리고 술과 파티로 진탕 놀고 시간을 보내는데 주변에 브라질 태생 귀족과 젊은 군인 그리고 정치인들이 모입니다.

이들은 어차피 왕도 없는데 우리 브라질 따로 놀자는 즉 독립움직임이 시작한 것입니다.

물자나 인구나 풍족한 브라질이 포르투갈에 붙어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 독립세력에는 프리메이슨이라는 단체의 영향이 큽니다.

또한 독립이 처음부터 공화파 그리고 왕당파 등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물론 뻬드로 1세는 아버지와 떨어져 나라를 운영할 의지와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주변의 강압에 아무리 왕이라도 차츰차츰 힘이 빠져 나갈 때였습니다....


포르투갈에서도 1820년 왕이 돌아간 후 몇차례 왕명을 보냈습니다.

먼저 전세계 식민지는 더 이상 리우데자네이루가 아닌 리스본에 복종할 것...

리우데자네이루 사법부 임무정지, 그리고 왕자의 귀환 등입니다.

그러나 이런 힘 세력에 맞서 브라질 식민지들은 끊임없이 왕에게 청원합니다.

좀 소통하자고.....


그러나 역시 말 안 통하는 국왕보다는 그래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왕자에게 모든 시선이 모입니다.

드디어 1822년 왕의 귀환명령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리우데자네이루 왕국에 모입니다..

그리고 뻬드로 1세는 중대 결정을 내립니다...의회에 통보하여 


짐은 이곳(리우데자네이루)에 있겠노라~~~ 

이게 그 유명한 Dia do Fico(번역: 머무르는 날) 입니다..

하여간 일단 포르투갈로 귀환을 포기한 뻬드로 1세는 한숨 돌렸다라고 생각하기도 전..

이제는 독립하자는 요구에 지쳐 갑니다....

아 힘들어~~~


그러던 중 1822년 8월 말 상파울로에서 독립운동 조짐이 벌여지자 400킬로미터 떨어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친히 군대를 몰고 올라옵니다.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며 복종을 요구하며 반대세력을 잠재웁니다...그리고...

뻬드로 1세의 애인은 이곳 상파울로에서 60 킬로미터 떨어진 산토스라는 해변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곳까지 온 김에 애인도 볼겸 해서 바닷가를 갔다 다시 상파울로로 돌아옵니다..

상파울로는 해발 750미터로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당나귀를 타고 천천히 올라 옵니다..

그러나 굴을 잘 못 먹었는지 배탈이 났습니다..

가다가 서고....조금 더 가다가 서고...

특히 강가 만 나오면 왕명으로 모든 짐을 풀고...천막을 치고...

강가에서 특왕X을 지리게 됩니다...

그리고 정신을 추스리면 다시 짐싸서 출발~~

뭐 이런 간단하지 않는 단계를 거치다...

드디어 상파울로 시내로 들어가는 언덕 강가에서 마지막 천막을 칩니다.

그 지역이 지금의 이삐랑가(ipiranga) 지역입니다..

아래 사진이 지금은 그냥 도량 같지만 당시만 해도 물이 제법 흐러던 강가였었습니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왼쪽 깃발대 근처에서 천막을 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잦은 X사와 고열로 힘들고 있을 때 포르투갈로부터 한 장의 편지가 급하게 전해집니다..

동 주엉 6세로부터 온 편지인데 그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아덜...

후딱 정리하고 빨랑 돌아와로..

안 오면 이~놈 하고 군대 보내 혼내준다!"


햐~~몸도 아프고 정신없고 짜증나고 있을 때 다른 편지도 도착합니다.

독립운동의 가장 중심인물인 주세 보니파시오(Jose Bonifacio)가 보낸 편지로 이제 포르투갈과 관계를 끊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가의 공주이자 아내인 마리아 레오뽈지나(Maria Leopoldina de Austria)로부터 온 편지는 더욱 가관입니다.

의회장과 모든 의원들로부터 독립지지를 받았다는 내용 그리고 "익은 과일을 따지 않으면 썩습니다."라며 힘을 주는 편지입니다..


햐~~정말 정신없죠? 

자 이럴수록 정신을 바짜 차려야 합니다..

좀 생각을 한 후...그래 결정했어!

서기를 불러 서류를 가져 오게 합니다..

바로 그 독립선언서 ...

그리고 짧게 서명합니다....

휘리릭~~~됐지?


서류를 받은 서기는 천막 앞에서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읽습니다.


"짐은 어쩌구 ....

모든 책임을...저쩌구...

해서....독립 아니면 죽음을!"..이라고 선언했다고 하는데....

정작 뻬드로는 침대에 누워서 비몽사몽이였고..

위와 같은 멋진 문구는 후대에 지어낸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독립선언을 그림으로 남기었는데 그 그림은 바로 아래 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백마를 탄 기사단들의 경례를 받으며 나에게 독립 아니면 죽을 달라~~라고 칼을 들고 소리치는 뻬드로 1세의 모습!

너무 멋진 이 그림은 1888년 브라질 화가 뻬드로 아메리꼬(Pedro Americo)의 1888년 작품입니다.

즉 독립이 이뤄지고 66년이 흐른 후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을 보면 몇 가지 오점이 있습니다.

먼저 당시 장거리 여행을 할 때는 말이 아닌 당나귀나 노새를 탔었습니다 그러니 저런 말을 타고 여행은 안 했고...

멋진 기사단은커녕 국립군대조차 없었던 시절에 호위기사는 당연히 없었고 귀족이나 농장주인들의 인부들 뿐이였다고 합니다.

뭐 어느 나라 역사나 자기 역사를 미화 시키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또한 재미있는 사실은 이 작품에는 화가의 얼굴이 있기도 한데...

바로 오른쪽 집 창문 아래에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 그리고 이 그림은 발표될 당시 선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바로 1875년 발표된 프랑스 화가 장 루이스의 작품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아래 그림을 보시면 대충 분위기 파악이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 이제 끝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고 금방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지방 곳곳에 왕정에 충성을 선언한 사람들과 몇차례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달리 해양대국도 아니고 인구도 적은 포르투갈로써는 식민지를 처들어 올 힘도 의지도 없었죠..

몇차례 전투로 잔재세력을 물리치고 충성 선약을 받은 동 뻬드로 1세 국왕은 이제 정치적으로 힘을 돌립니다.

바로 당시 대국이였던 영국과 협상을 하는 것..

영국이 독립국으로 인정을 해주면 뭐 이미 끝난 게임이었죠..


결론은 독립당시 주체세력이였던 계몽주의(프리메이슨)자들이 원했던 세상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원했던 노예해방은 물 건너갔고..

농업혁명 또한 정착되지 못하고 일부가 대다수를 가진 농장 대지주 제도..

1차 산업이 이끄는 수출제도..

그리고 공화정이 아닌 왕정제...


자 이제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독립은 큰 적자입니다.

먼저 1820년 동 주엉 6세가 포르투갈로 돌아가면 나라에 있던 현금이라는 현금을 모두 싹쓸어 갔습니다.

따라서 나라는 빈털털이였습니다...1808년에 설립된 브라질은행은 파산했습니다.

그리고 독립을 지지해주던 영국의 중재로 브라질은 영국에 당시 돈으로 2백만 리브라를 채무지게 되었습니다.

이 돈은 당시 포르투갈이 영국에 지고 있던 채무로써 브라질이 수도였을 당시에 차용했던 돈인데..

이제 독립했으니 대신 갚으라는 것이죠 이게 브라질 대외채무의 시초이기도 합니다...

첫 걸음마가 이렇게 빚으로 시작했으니 에휴....


즉 독립의 기초였던 평등. 기회. 자유. 경쟁을 얻을 수 있었지만 가볍게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이 지고 있던 빚을 떠 안고 시작한 나라..

그래서 아직까지 밑에 있는 사람들은 허덕이고 발전이 더딘 나라가 된 것입니다.


아 그리고 동 뻬드로 1세는 정작 독립을 선언 한 후...

남부독립운동으로 현재의 우루과이를 빼앗기고..

포르투갈은 아버지 동 주엉 6세가 사망 한 후 여동생에게 왕위가 넘어 갔었으나

막내 남동생이 정권을 휘둘러 어지럽고...

하여간 양국간 문제를 해결하려다..

결국 1831년에 아들 동 뻬드로 2세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포르투갈로 돌아 갑니다..

그리고 남동생과 전쟁을 치루는데..

처음에는 내전이 점차적으로 이베리아 반도로 퍼지며...

전제주의와 자유주의의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 1834년 힘겹게 전제주의를 회복 시켰으나...

안타깝게도 전쟁이 끝난 몇 달 후 폐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

36살 젊은 나이에...

그래도 지금 브라질이라는 나라를 만든 인물로 존경을 받고 포르투갈에서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기는 합니다.


자 재미있으셨나요?

오늘은 이것으로 끝내지만 브라질 역사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 됩니다..


아 맞다 아래 사진은 현재 상파울로 있는 독립을 선언한 곳에 세워진 이삐랑가 독립기념 박물관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한 번 여행오세요~~!



반응형